본문 바로가기
법학

“위법한데도 처벌할 수 없는 경우”를 가려내는 마지막 관문__책임론

by jeonginlog 2026. 1. 3.

형법에서 범죄 성립을 판단할 때 흔히 세 단계 구조를 사용한다. 먼저 사실관계가 범죄의 틀에 들어맞는지(구성요건 해당성)를 보고, 그 다음 그 행위가 법질서 전체 관점에서 허용될 수 없는지(위법성)를 본다. 마지막으로 남는 단계가 책임론이다. 책임론은 위법한 행위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을 비난하며 처벌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다시 말해 책임론은 “행위가 나빴다”와 “그 사람을 처벌할 수 있다”를 구분하는 장치다.

이 구분이 필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형사처벌은 단순한 손해배상이나 행정 제재보다 훨씬 강력하고 낙인이 큰 조치다. 그래서 형법은 결과가 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처벌하지 않고, 그 결과를 낳은 사람이 당시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는지, 법을 지키는 방향으로 행동을 통제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법한 선택을 했는지를 따진다. 책임론은 형법이 결과책임으로 기울지 않도록 막고, 인간의 자유와 한계를 고려한 공정한 처벌을 가능하게 한다.

1) 책임의 의미: 비난 가능성과 처벌 정당화

책임은 흔히 “비난 가능성”으로 설명된다. 어떤 사람이 위법한 일을 했더라도, 그 사람이 그 상황에서 법을 지킬 수 있었고 지켜야 했는데도 지키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처벌이 정당화된다는 생각이다. 반대로 행위자가 법을 지킬 능력이 없었거나, 현실적으로 법 준수를 기대하기 어려웠다면 위법하더라도 처벌은 과잉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책임론은 사람을 처벌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기준을 “행위의 외형”이 아니라 “행위자의 상태와 상황”으로 끌고 온다. 이 점에서 책임론은 인권 보장의 핵심 축이며, 형법이 도덕적 분노를 그대로 처벌로 번역하지 않게 만드는 안전장치다.

2) 책임능력: 처벌의 전제 조건

책임론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는 책임능력이다. 책임능력은 쉽게 말해, 사람이 자신의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고 그에 따라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 능력이 없다면 비난 가능성도 약해진다.

책임능력 논의는 주로 정신상태와 관련된다. 심각한 정신적 장애나 의식의 문제로 인해 현실 판단과 자기 통제가 현저히 어렵다면 책임이 제한되거나 배제될 수 있다. 다만 책임능력은 “조금 힘들었다”는 수준으로 쉽게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법이 요구하는 기준에 따라 엄격하게 판단된다. 책임능력 판단은 감정적 판단이 아니라, 당시 상태가 실제로 이해·통제 능력을 어느 정도까지 약화시켰는지에 관한 구체적 평가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연결 지점은, 책임능력의 문제를 “일시적 상태”와 결부해 책임을 회피하려는 시도를 어떻게 다룰지다. 예컨대 스스로 통제력을 잃을 상태를 만들어 놓고 책임을 부정하려는 구조가 등장할 수 있는데, 이런 문제를 다루는 이론들이 책임론과 맞물려 논의된다. 책임론은 이런 경우에도 무조건 책임을 부정하거나 무조건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 단계의 선택과 예견 가능성, 불가피성 등을 종합해 결론을 도출하려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3) 고의와 과실: 마음의 방향이 책임을 좌우한다

책임론은 행위자의 내심과도 연결된다. 일반적으로 고의가 인정되는 경우 비난 가능성은 커지고, 과실인 경우에는 주의의무 위반의 정도와 예견 가능성이 핵심이 된다. 형법이 고의범과 과실범을 구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같은 결과가 발생했더라도, 결과를 의도하고 선택한 것과, 주의 부족으로 발생한 것은 비난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결과를 어느 정도까지 인식했는가”는 책임의 크기와 범위를 가늠하는 중요한 포인트다. 행위자가 위험을 알면서도 무시했는지, 위험을 과소평가했는지, 위험을 피하려고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등은 결국 비난 가능성의 강도를 좌우한다.

4) 기대 가능성: 그 상황에서 ‘법을 지킬 것을’ 요구할 수 있었는가

책임론에서 자주 논의되는 요소 중 하나는 기대 가능성이다. 이는 어떤 사람이 위법한 행동을 했더라도, 그 사람에게 그 상황에서 법을 지킬 것을 기대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묻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극도의 공포나 급박한 위협 아래에서 선택이 크게 제한된 경우, 법이 요구하는 수준의 침착한 판단과 행동을 기대하기 어려울 수 있다.

여기서 핵심은 “사람이면 당연히 참아야지” 같은 도덕 판단이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 선택 가능성이 실제로 얼마나 남아 있었는지다. 기대 가능성 논의는 처벌의 엄격함을 조절해, 형법이 인간의 현실적 한계를 무시하지 않도록 한다.

5) 위법성 인식 가능성: 몰랐다고 다 용서되는가

책임론에서는 위법성을 인식할 수 있었는지도 문제 된다. 다만 “몰랐으니 무죄”라는 단순한 공식은 아니다. 일반적으로는 법을 몰랐다는 사유만으로 책임이 쉽게 부정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법령이나 행정기관의 안내 등으로 인해 정당하게 믿을 만한 사정이 있었는지, 해당 분야가 일반인이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했는지, 행위자가 위법성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는지 같은 사정에 따라 책임 평가가 달라질 여지가 있다. 결국 책임론은 “무지” 자체가 아니라 “인식 가능성과 회피 가능성”을 중심으로 비난 가능성을 조정한다.

6) 정리: 책임론은 처벌의 정당성을 완성한다

책임론은 범죄 판단의 마지막 관문이다. 구성요건에 해당하고 위법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면 처벌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책임능력, 고의·과실, 기대 가능성, 위법성 인식 가능성 같은 요소들은 모두 “그 사람을 비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수렴한다. 책임론이 단단할수록 형법은 결과책임이나 감정적 보복으로 흐르지 않고, 인간의 자유와 한계를 고려한 규범으로 작동한다. 결국 책임론은 형법이 단순히 금지와 처벌을 선언하는 법이 아니라, 언제 처벌이 정당하고 언제 처벌이 과잉인지 경계를 그어 주는 정교한 판단 체계임을 보여주는 핵심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